위근우가 쓴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겁니다.
프로불편러 일기라는 책도 썼던 데 그 책은 과연 어떤 내용일지 기대하게 만드는 내용이었다.
사실 이 책은 초반부의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들은 공감하기 힘든 것도 많았다.
그래서 심지어 한 때는 버릴까 생각도 했다.
그런데 침착하게 정신을 차리고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니까, 그러한 내용들은 사실 나를 겨냥한 게 아닌데 내가 괜히 그런 말들에 억울해하는 건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고, 단점에 주목하기 보다는 장점으로 눈길을 돌리려 노력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 책에서 내 마음에 드는 것들만 골라 읽었다는 건 아니다. 그래서는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진의를 오독하고 왜곡하기 십상이다. 작가의 본의는 헤아리되, 그로부터 묻어나는 억울함에 대해서는 초연한 반추를 시도했다는 의미다.
하여간 초반부를 넘어서 중반부를 거쳐 후반부로 갈수록 나는 언론과 방송을 바라보는 그의 식견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어떤 것들에 대해서는 마음 속 깊이 맞장구쳤고, 또 어떤 것들에 대해서는 그 생각의 깊이에 경탄했다. 나아가 방송언론계에서의 경력에 비춘 분석들과 신념들은 과연 지인들에게 권할만한 것들이었기에 기록으로 남긴다.
'뉴스는 팩트다.'라는 말은 '뉴스는 팩트여야 한다'는 뜻이어야지 '뉴스는 팩트면 된다'는 뜻이어선 안 됩니다.
언론이란 사회적 공익이라는 목적을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사회적 영역이자 조직입다. ㅇ너론은 지금 이 기사에 담긴 정보와 현상에 대한 분석이 독자에게 제공됐을 때 그렇지 않을 때보다 세상의 개선에 도움이 된다는 믿음 위에서 사회적 분업으로서 가치를 가질 수 있습니다.
알권리는 언론의 자유가 그러하듯, 보편적인 권리가 아닙니다. 알권가 있다면 당연히 알려지지 않을 권리 역시 있으며, 정보의 평등이 명백히 사회적 평등으로 이어지는 경우에만 우리는 알권리를 요구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떄문에 언론인은 알권리라는 모호한 개념에 의존해 보도를 정당화하는 대신, 독자가 알 필요가 있는 정보와 알 필요는 없지만 독자가 알기 원하는 정보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와우 실로 멋진 글이었다. 흔히 사람들이 생각 없이 주워 섬기는 <알 권리>에 대해서 일격을 가하는 모습은 얼마나 대범한가? 이런 멋진 생각을 가진 사람의 페미니즘에 일부 동의하지 못하는 내가 문제겠거니 생각해본다. 흠흠흠. 큰 틀에서는 동의할 수 있다. 이를테면
누구도 생득적 이유로 차별받아선 안 된다
.와 같은 문장이다.
이런 문장에 동의하지 않고 자유민주주의 사회를 살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고 나는 이에 대하여
논란의 여지를 불식한만한 대표적인 생득물 중 하나는 성별이라는 데 동의한다. 따라서 그 누구도 성별을 이유로 차별받아선 안 된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다. 페미니즘의 기초가 이러한 당연한 생각에 있는 거라면 지금의 나는 어째서 그 중 일부에 대해 선뜻 동의하지 못하는 것일까? 결국 내가 한남이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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