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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낙서

제사 없앤 후기: 장손이 제사 폐지, 명절 제사 없애기

by 통합메일 2022.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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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회상인 만큼 경어를 생략합니다.


우리 집은 유서 깊은 가문의 종가집이나 뭐 그런건 절대 아니고 좀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달까.. 그러니까 흔히 말하는 방계 집안이었음. 방계가 뭐냐하면.. 

방계: 자기와 같은 시조에서 갈라져 나간 다른 계통을 말하며, 직계에 대응하는 개념

그러함.

그러니까 우리 할아버지께서는 경상도 지방의 나름 이름 있는 가문의 유생이었고, 사람을 좋아하시다 보니까 부인을 여럿 두셨던 모양임. 그 여러 부인 중의 한 명이 우리 할머니였던 것인데.. 무슨 사연이었는지까지는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경상도에서 좀 거리가 먼 지역까지 와서 새로 살림을 차리셨는지 하여간 그러한 연유로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 그러니까 지역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지역은 경상도와는 좀 거리가 떨어진 지역이었음. 이걸 처음 알게 된 것은 고등학생인가 대학생 때였는데 적잖이 충격이었던 것. 한 때는 우리 할머니가 할아버지의 첩인가 생각도 했는데 그건 아니고, 그냥 여러 부인 중의 한 명이라고.. 하긴 첩이라기엔 자식을 너무 여럿 두기도 하셨고.. 자식을 여럿 낳았는데 상당 수가 죽고 최종적으로 남은 것은 3남 1녀인데 우리 아버지는 그 중의 맏아들임. 그리고 나는 그 맏아들의 맏아들임. 그러니까 a.k.a 장손임.


이게 방계이다 보니까 어릴 때는 우리끼리 독자적으로 제사를 지내지 않고.. 그러니까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는 말이지.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는 할아버지 제사를 직계 본가에서 지내니까 우리가 동시에 다른 곳에서 할아버지 제사를 못 지내는 모양이었음. 그래서 우리 아버지랑 작은 아버지들이랑 사촌동생들이랑 같이 직계 본가네까지 가서 하룻밤 자거나 하면서 제사를 지내곤 했음. 이게 지역적으로 꽤 멀리 떨어져 있기도 하거니와 그래서 또 사용하는 말이 사뭇 다르다보니 정말 민족 대이동의 느낌도 나고.. 기분이 묘하고 야릇했음. 일년에 두 번 그렇게 명절 제사 지내러 직계 본가에 가는 게 참 큰일이기도 했고.. 가슴 벅차오르는 일이기도 했고.. 핏줄이란 게 이런 것인가 싶기도 했달까.


아 그러고보니 그 직계 본가라는 게 한 번 변경이 있었음. 그러니까 처음에는 우리 큰아버지 댁으로 찾아갔음. 뭥미? 무슨 말이냐고? 아까는 우리 아버지가 맏아들이라고 했는데 갑자기 왜 큰 아버지가 나오냐고?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는 방계의 맏아들이지 전체 항렬의 맏아들은 아닌 것. 직계 본가의 맏아들은 따로 경상도 본진에서 살고 계셨음. 사투리가 음칭이 심하셔서 때로는 소통이 좀 어려울 정도셨음. 그래서 아주 어릴 때까지는.. 그러니까 초등학생 때까지는 큰아버지 댁으로 제사를 지내러 갔던 것 같고.. 이후로는 큰아버지께서 돌아가셔서 큰아버지의 아드님,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에게는 조카, 나에게는 사촌형댁으로 제사를 지내러 갔음.


여기서 또 묘한 것이 나이인데.. 큰아버지랑 우리 아버지랑 나이 차이가 좀 나기도 하고 큰아버지께서 원체 결혼을 일찍 하신 모양인지 큰집 사촌형이랑 우리 아버지랑 나이 차이가 얼마 안 나고.. 심지어 큰집 사촌형이 우리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았음. 당연히 큰집 형이 낳은 그 아들.. 그러니까 내게는 조카인 사람도 나보다 나이가 몇 살 많았음. 하하하. 어린 나이에 그들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라서 굉장히 어려웠던 기억이 남. 그들도 자신을 뭐라고 부르라고 뾰족하게 말하지 못하는 게 참 슬펐음. 나중엔 그냥 같이 조카랑 담배 피우면서 형이라고 했음. 다 무슨 소용이랴;;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내가 너보다 나이는 어려도 내가 니 삼촌이라고 대거리 할 것도 아니고 ㅎ 하여간 다들 좋은 분들이셨고.. 오고 가는 여정이 어렵고 힘들고 그 과정에서 다투기도 했지만 뭐 시간이 지나니 다 추억이기는 함.


자 근데 문제는 우리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시작됨. 지금까지는 할머니께서 살아계신 상태에서 큰집으로 제사를 지내러 안 가면 우리는 명절에 제사도 못 지내는 집안이 되어버리니까 꾸역꾸역 갔던 것 같은데 이제 할머니께서 돌아가시니까 우리도 제사 모실 분이 생긴 것임. 그래서 이제는 할머니 제사를 모셔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서 큰집에 양해를 구하고 각자 제사를 모시기로 함. 아쉬운 점도 있었지만 그 집도 매번 명절마다 엄청난 인원을 받는 것도 큰 일이었고.. 우리도 애들이 많이 크다보니까 우리끼리 뭔가 일가를 이뤄야 한다는 생각에 옳은 결정이라고 다들 생각했음. 그래서 우리 아버지는 이제 진짜 맏아들, 장남, 장손이 되어 제사를 모시는 제주 역사를 일 년에 세 번(설날, 제삿날, 추석)씩 하게 됐음.


그런데 문제는 우리 아버지가 뭔가 그런 걸 제대로 할 줄 아는 위인이 아니라는 것임. 우리 아버지는 세상 물정을 좀 잘 모르시고, 손재주도 없고, 수완도 없고, 사교성도 떨어지는 그런 분임. 그냥 공부 머리가 똑똑하고 올곧고 그런 분임. 갈등을 합리적이고 슬기롭게 해결하는 능력도 다소 떨어짐. 그렇다보니 제사는 지내야겠는데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진전이 없었음. 그래서 보다 못한 우리 어머니가 팔을 걷어 붙이고는 제기(제사 그릇)를 구입하고 제사 음식 만드는 법을 공부해서 어찌어찌 첫 제사를 치렀음. 이 과정에서 우리 아버지가 한 일이라고는 별 게 없었음. 위패에 지방 써서 붙이는 것 정도랄까. 아 물론 제사에 대해서 연구하고.. 제사 절차를 공부해서 제사 과정을 주관하는 제주로서의 역할은 잘 했음. 그런데 알다시피 사실 그건 그냥 실질적으로 30분 만에 끝나는 일이고.. 그 30분을 만들기 위해 들어가는 모든 노고는 온전히 우리 어머니의 몫이었음. 처음에는 내가 많이 도와드리려고도 했지만 한계가 있었고 무엇보다 어머니는 이렇게 고생해서 제사를 지내는 원인을 제공하고 있는 아버지가 제대로 자신의 역할을 하지 않는 데에 대한 분노가 가득 차있었음. 근데 어쩔 수 없는 게 아까도 말했지만 우리 아버지는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재주나 수완이나 눈썰미가 없다 보니까 그냥 어깨 너머로 배운 정도 밖에 못 하는 사람임. 사람 중에는 배운 대로만 할 줄 아는 사람이 있고, 하나를 알려주면 둘을 하는 사람이 있고, 하나도 알려주지 않아도 혼자서 열을 해내는 사람이 있는데 우리 아버지는 첫번째 유형에 속하는 사람임. 맨날 서울 큰댁 가서 본 것이라고는 제사 당일 큰아버지나 사촌형이 제사 주관하고 술 마시는 것만 봤지 그 제사가 이루어지기까지 그들이 어떤 노고를 기울였을지에 대해서는 본 게 없다보니까 그걸 못 하는 게 아닌가 하고 한 번 생각해 봄. 그게 아니라면 우리 아버지는 그냥 이기적이고 게으른 사람이 되어버리니까.


물론 우리 어머니도 문제가 좀 있음. 그렇게 부당하고 억울하다고 생각이 되고 분노가 터진다면 뭔가 합리적으로 제사를 없애거나 규모를 조절하거나 하는 방식을 생각해 봤어야 하는데 그러기 보다는 그냥 제사는 지내되 그때마다 엄청나게 분노를 터뜨리는 식으로 대처했음. 이 과정에서 우리 어머니를 더 화나게 만든 사람들이 바로 작은 어머니들인데.. 첫째 작은 어머니와 둘째 작은 어머니가 있음. 처음에는 다 같이 모여서 제사 음식을 하기로 합의를 봤고 정말 세 집 자손들이 다 모여서 나름 재미있게 음식도 만들고 했음. 그런데 점점 이 방식에 대해서 작은 아버지나 작은 어머니들이 불만을 갖기 시작했음. 일단 우리 아버지는 사교성이 없기 때문에 집에 동생들이 놀러와도 제대로 응대를 못함.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 숨어버림. 안 나옴. 그러면 작은 아버지들은 자기들끼리 소파에 앉아서 TV나 멀뚱멀뚱 보는 데 이게 죽을 맛 아닌가. 그러다가 그나마 술 마실 때가 되어서야 한 상에 모이는데 거기서도 우리 아버지는 제대로 응대를 못함. 작은 아버지들도 딱히 매력적인 언사를 하는 건 아니지만 내가 보기엔 우리 아버지가 좀 제일 문제 같았음. 동생들에 대해서 자기가 제일 잘 났다는 걸 꼭 확인시키고 납득시키려는 의지가 너무 강함. 우리 아버지가 제일 잘 된 건 맞긴 맞는데 그걸 굳이 동생들에게 그렇게 으시대니까 점점 동생들이 안 오려고 하고, 작은 어머니들도 뭔가 와서 노동하는 것에 비해서 재미도 없고 잠자리도 불편하고 그러니까 슬슬 안 옴. 그래서 언제부턴가 그냥 우리 어머니가 독박을 쓰고 음식을 하고 각 집에서는 10만원씩 돈을 내기로 함. 근데 그러다가 슬슬 그 돈 내는 것도 아까웠는지 돈을 안 주려고 그냥 넘어가거나 하는 일이 생겨서 그 다음부터는 이제 각각의 집에서 파트를 나눠서 요리를 준비해 오기로 함. 근데 셋째 작은 어머니는 가장 성격이 이상하고 약아 빠지고 인성이 안 좋고 그러해서 그냥 자기는 과일을 준비해 오기로 함. 그냥 돈 주고 사오겠다는 것이었는데 매해 사오는 과일마다 품질이 그냥 그랬음.


그리고 제사 당일 제사상을 차리거나 제사상을 치우거나 하는 과정을 보면 가만히 보니까 진짜 남자들은 일을 안 하고 가만히 앉아 있으려는 게 막 보임. 나는 장손이기도 하고 당연히 일해야 한다는 생각에 열심히 일하는 데 내 밑에 남자 사촌 동생들은 일 할 생각을 안 함. 작은 아버지들도 그냥 소파에 앉아 있음. 나는 저들이 뭔가 최선을 다해서 뭔가 더 원대한 명분과 목표를 가지고 저렇게 힘겹게 앉아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해 보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그냥 그들은 그게 너무나도 당연한 것 같았음. 그나마 나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씁쓸함을 삼키면서 그냥 내 나름대로의 일을 열심히 하고 그랬지만, 우리 아버지는 그 꼴을 보고 속으로 분통을 터뜨리거나.. 아니면 자기도 덩달아서 일을 안 하거나 그랬음. 아니면 좀 색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동생들에게 복수를 했는데. 대부분은 자신의 박식함이나 학력을 이용해서 상대방을 개망신 주는 그런 행동들이었음. 당연히 그러면 동생들도 앙심을 품고 더 거리를 두는 것이고.

 

결국 몇 해 전인가부터 셋째 작은 아버지댁에서는 제사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함. 그것도 문자로 ㅋ 솔직히 굉장히 신박하다고 생각했음. 이 국면에서 가장 먼저 선빵을 날리는 것이다 보니까 가장 지탄의 대상이 되기 쉬운 일인데 그것을 그냥 통보의 형태로 그냥 문자로 날리고 말았음. 근데 더 웃긴 건 우리 아버지는 그걸 어떻게 컨트롤 할 지 몰라서 그냥 그렇게 두고 보기만 할 뿐 아무 것도 못했다는 것. 혼내지도 않았고, 달래지도 않았고..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았음. 우리 아빠의 삶의 방식이 그러함. 그냥 가만히 있으면 잘 되겠지. 마치 타조와 같은 태도로 세상을 살았는데 용케 사자에게 잡아먹히지 않았음.


이런 문제들이 굉장히 중첩된 상태였음. 언제부턴가 대체 이 제사를 왜 하고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음. 다들 그 누구도 진심은 없고 껍데기 밖에 없는 제사. 보기 싫은 사람들을 왜 자꾸 봐야 하는지 모를 제사. 그런 생각을 하던 즈음에 나는 결혼을 했음. 결혼을 하고 일이년 정도는 계속 제사를 지냈는데 그 과정에서 아내가 한 두번쯤 지나가는 말로 제사 없애야 한다는 말을 읊조리곤 했음. 엄청 강하게 푸쉬하는 건 아니고 그냥 한탄하는 느낌으로?

 

그러다가 추석이었던 것 같은데.. 그 날도 아침 꼭두 새벽부터 우리 어머니는 며칠에 걸쳐 준비한 음식들을 세팅하셨음. 이제 슬슬 일어나려고 하는데 큰 소리가 났음. 밖에 나가보니 어머니랑 아버지랑 큰 소리를 서로에게 지르면서 대거리를 하고 있었음. 나는 어릴 때부터 자라면서 엄마 아빠가 싸우는 모습을 많이 보고 자랐기 때문에 그런 걸 보고 큰 충격을 받거나 슬픔을 느끼기 보다는 그 감정을 그냥 씁쓸함으로 바꾸는 훈련이 잘 되어 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그걸 보면서 조용히 분노에 시동을 걸었음. 위에서 말한 여러가지 원인들이 종합적으로 계산되어 결국 제사를 없애야 한다는 답에 이르렀음.

 

아버지는 제사 아침이면 본인이 그 일에 대해서 스트레스를 받아서 어쩔 줄 몰라하면서 옷만 이것저것 갈아입고 담배를 피우러 밖으로 들락날락거리기에 바쁨. 하지만 어머니를 도와 제대로 일을 하기 위해서는 일단 언제든 동원될 수 있도록 부엌에서 상주하는 태도가 필요하고 더 나아가서 자기가 제사 음식 한 두개 정도는 담당하겠다고 나설 줄도 알아야 하는데 이미 자기는 그런 것을 할 줄 모른다고 선을 긋고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안 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음. 아직 도착하지 않은 친척들도 다 공범이라고 생각했음. 어찌보면 더 일찍 일어나서 일을 돕지 못한 나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음.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이 제사는 더이상 계속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음.


잠시 후 작은아버지 댁에서 도착했음. 내 사촌동생 내외와 조카들도 왔음. 싸우기는 싸웠지만,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면서도 어찌어찌 제삿상을 차리기는 차렸음. 분위기가 안 좋다고 생각한 작은 어머니가 얼른 달려들어 엄마를 달래면서 일을 도왔고, 작은 아버지는 아버지에게 형수에게 잘 좀 하라고 너스레를 떨었음. 하지만 나는 그 과정을 보면서 이렇게 가면 또 다음 명절에 똑같은 일이 일어나겠다는 확신을 가졌음. 그래서 제사를 일단 지내고 난 다음에 다들 거실에서 서성거릴 때 작은 아버지랑 작은 어머니 보고 앉아보시라고 한 다음에 이렇게 말했음.

 

작은 아버지 작은 어머니, 이번 제사가 마지막 제사입니다.

 

솔직히 엄청 용기를 내서 말한 건데 효과가 엄청 났던 게.. 작은 어머니는 곧바로 수긍하듯이 그래 조카 이제는 너무 힘들어서 그만 해야지 그만해라고 하고..  작은 아버지는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고 뛰쳐나가버렸고, 우리 아버지는 자기 방에 문 잠그고 들어가서 혼자 술을 엄청 마시기 시작했음. 와 내가 항렬은 하나 아래지만 장손은 장손인지라 파워가 이 정도인가 싶기도 했고..

 

얼마간 욕은 좀 먹었음. 아버지가 나 안 보려고 좀 그랬는데.. 일이주일 지나니까 또 그냥 똑같았음. 우리 아버지의 문제 해결 방식대로 그냥 내버려두니까 알아서 잘 풀렸음.

 

약간 어이가 좀 없었던 건 사촌 동생이었는데 이 녀석은 정말 그 나이에 가부장스러움이 좀 많이 박혀 있다보니까 그냥 제사 없애는 게 마냥 싫은지 나중에 문자로 좀 더 천천히 신중히 생각해 보면 좋겠다고 문자를 보내오길래 그냥 싱긋 웃어줬음. 그럴 거였으면 평소에 제사 지낼 때 좀 적극적으로 일 좀 하지 그랬나. 지 마누라도 와서 설거지 하는데 제삿집 와서 제대로 뭐하나 거들지 않고 그냥 제사를 없애면 안 된다고 말하는 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함.

 

내가 이 얘기를 여기저기 하고 다녔는데 그에 대한 반응을 보면 정말 잘못된 생각 가지고 있는 사람들 골라내기 딱 좋은 소재임. 내가 멀쩡하게 잘 돌아가고 있는 제사를 없앤 것도 아니고, 여러 사람 병신 만들고 다투게 만드는 제사를 없앤 것인데 그에 대해서 씁쓸함을 표하는 사람들은 참 속도 모르고 편하게 말한다는 생각을 하게 함. 이를테면 우리 큰외삼촌은 

 

그까짓거 얼마나 힘들다고 그걸 없내냐

라고 굉장히 안 좋은 표정으로 쯧쯧거렸음. 지 누나 힘들어 죽는 것도 모르고 어휴.


결국.. 내 아버지가 없애지 못한 제사를 나는 내가 없앴음. 어쩌면 뭐 세간이나 친척들 사이에서 후레자식에 쌍놈으로 운운될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나는 내 가장 가까운 사람들 지키는 게 시급했고, 결혼한지 얼만 안 된 우리 아내에게 가급적이면 이 집안의 좋은 면모들만 보여주고 싶었음. 바글바글대는 것도 우리의 한때의 추억이기는 했으나 너무 거기에만 얽매여 있어서는 미래로 나아갈 수가 없고 우리가 정녕 소중히 여겨야 하는 것들을 제대로 챙길 수 없다는 생각에 이르렀음.

 

그렇게 제사를 없애고 2년 정도 지난 것 같은데 지금은 다들 잘 지냄. 뭐 그때는 혈연관계가 다 절단날 것처럼 그러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서로 안 보고 지냄. 그러니까 우리 윗 항렬 아버지들은 원래 서로가 별로 안 친했음. 서로가 서로를 안 좋아했음. 그나마 제사라도 있으니까 1년에 세 번 얼굴 보는 거였는데.. 그렇게 얼굴 보고 의를 돈독히 하기 보다는 서로 싸우기에 바빴음. 시기하고 으시대고 무시하고 망신주고. 제사를 안 지내서 소원해질 것 같으면 서로가 좀 연락해서 만나는 노력이라도 할까 싶은데 그런 건 당연히 전혀 없는 것이고.. 그냥 자신들의 삶에 만족하면서 살아감.

 

덕분에 명절에는 오붓하게 가족끼리 시간을 보내거나 여행을 가거나 하는 등의 일과가 가능해졌음. 명절 아침마다 긴장한 상태로 일어나지 않아도 되게 되었음. 아내의 괜한 등살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게 되었음. 생각해보면 코로나 때문에 어차피 없어졌을 거 괜히 앞서서 긁어부스럼 만들었냐 싶기도 하지만.. 뭐 하여간 알게 모르게 다들 나에게 고마워 하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시간이 가면 갈 수록 하게 됨.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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